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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뭉클한 한겨레 신문 탄생 이야기 ...

천본앵 2008. 7. 2. 22:18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1974년 12월부터 1975년 5월까지 동아일보의 지면이 비거나 이상한 광고로 채워지는 일들이 있었다. 아예 백지로 나오거나 일반시민들의 작은 광고들이 지면을 채우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과 국회해산을 포함한 유신헌법을 발효시키자 많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은 저항을 시작했다. 73년 박정희가 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지식인들의 극렬한 저항은 이후 2년여동안 계속되었고, 유신정부는 74년 1-4회의 긴급조치를 내렸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언론은 철저한 통제를 거쳐 제작되었다. 제목의 단어 하나 하나까지 정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교정 받아 실렸다. '연탄값 인상'이란 제목도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연탄값 현실화'로 바꾸기도 하는 등의 전방위 통제가 지속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자괴심에 빠져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언론의 보도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동아일보를 불태우는 시위를 벌이자, 기자들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떨치고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


이 가슴 뭉클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의는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제작거부로 맞서다 25일에 실리게 된다. 그 이후 동아일보에는 그간 긴문에 실리지 못하던 인권, 데모, 야당인사들의 발언, 개헌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사가 실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정부는 결국 광고주들을 회유협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를 조여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의 시작이다.